전문가칼럼
탄소중립 시대와 석유산업의 경쟁력
이재승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장)
새로운 도전과 선택
<이탈, 항의, 충성(Exit, Voice, and Loyalty)>. 경제학자인 앨버트 O. 허시만의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세 개의 단어는 탄소중립 시대에 석유산업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상징해 주는 듯하다. 조직이 제공해주는 혜택이 감소하고 위기 상황에 놓이면 구성원들은 탈퇴하거나 항의한다. 탈퇴의 옵션이 매력적이지 않거나, 자신의 목소리로 조직을 개혁하고 살아남을 수 있으면 끝까지 남는 선택을 한다.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렇다면 언제 떠나고, 누가 남고, 무슨 목소리를 낼 것인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제기된 탄소중립의 논의가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면서 화석연료의 시대가 얼마나, 어떤 모습으로 지속될 지에 대한 여러 전망이 나오고 있다. 기존의 에너지 소비 구조에서 전기와 재생에너지로 이행해 가면서 석유, 특히 수송 분야의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으며, 탄소세, 플라스틱세의 도입은 탈석유화를 가속화 할 것으로 보인다. 화석연료 시대가 언제 저물지는 석유와 가스가 언제 고갈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탈탄소화의 추세에서 얼마나 오래 관련 수요와 산업들이 유지될 것인가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석유산업을 포함한 전통에너지 및 제조업 분야에 새로운 도전이 제기되었다.
OPEC와 IEA는 2040년 이후에도 여전히 석유와 가스를 포함한 화석연료가 주요 일차 에너지원으로 사용될 것으로 전망한다. 지속되는 인구 증가와 개발도상국에서의 수요 증가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석유 소비의 감소분을 상쇄할 수 있다. 탄소중립은 화석연료 사용량을 제로로 만드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시간이라는 변수가 탄소중립과 탈탄소 논의에 존재한다. 탄소중립이 목표로 세운 2040년이나 2050년은 상당한 시간적 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단기간의 수요 변화를 주도하지는 않는다. 광범위한 논의에 비해 실제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기본 요소와 코로나 시기 동안 생산과 투자 침체로 인한 재고 부족에 반응하고 있다. 오미크론의 확대로 미루어지고 있는 글로벌 경기 회복이 본격화되면 석유 수요는 다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적어도 중단기적인 시장 전망은 여전히 견고하다.
그러나 이러한 수요 전망이 기후변화와 탈탄소화의 추세를 근본적으로 대체하기는 어렵다. 속도와 범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주요 국가들이 도입하고 있는 탄소중립 기조는 쉽게 대체되기 어렵고 에너지의 전기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에너지의 중심축으로서 늘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석유산업은 자신의 역할과 중요성, 그리고 퇴장의 경로까지 스스로 규정할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한국에 있어서 석유산업은 탄소중립 과정에 있어서 에너지 안보와 산업 혁신의 두 가지 차원에서 명확한 역할과 목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정책의 영역에서, 후자의 경우는 기업의 영역에서 두드러진다.
에너지 안보는 여전히 중요한가
한국의 에너지 안보는 “미•중 대립과 한반도 분단에 따른 지정학적 갈등 하에서, 수출 지향형 경제 강국으로서의 경쟁력 유지에 필요한 고품질의 에너지 공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잠재적 위협에 대한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에너지 수급 체제를 확립”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또한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급 불안정을 최소화함으로써 지속적 탄소중립의 기반을 제공하는 에너지 안보의 역할도 부각된다. 현 단계에 있어서 석유는 최대 비중의 일차 에너지원이자 핵심적 산업 기반으로, 석유 공급의 불안정은 한국 경제와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 요인이 된다. 비전통 화석자원(셰일 등)의 개발로 생산량이 확대되며 지역적 편중도가 완화되었고, 기후변화 대응에 따른 에너지정책 전환 및 기술 발전 등으로 수요 측면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지만 전통적인 에너지 안보 구조의 상당부분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지정학적 불안요인 증대, 자원개발 투자 위축, 신흥국 수요증가로 석유 수급의 불균형 가능성은 상존한다. 특히 미국이 거의 독자적인 에너지 수급 역량을 갖추게 되면서 중동 및 국제분쟁에의 개입은 불확실해졋다. 글로벌 에너지 안보를 해결할 주체가 불명확해지면서 각자도생의 에너지 안보 체제가 열리고 있다. 에너지 안보가 대응해야 할 위협 요인은 과거에 비해 “작은 규모로” “다발적으로” 존재하며, 자체 역량에 기반한 신속하고 유연한 대응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OPEC+를 중심으로 한 주요 생산국의 힘겨루기가 지속되고,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갈등 고조는 일차적으로 유럽의 에너지 수급과, 뒤이은 국제 시장에서의 수급 불안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의 위험은 환경과 에너지가 제로섬 게임의 시각에서 상호 배타적으로 놓이는 상황이다. 이는 에너지 안보의 차원에서 왜곡 현상을 가져올 수 있으며, 기존에 보유한 유·무형의 자산을 소진시킨다.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도 기업 및 소비 주체들이 안정적인 경제 활동을 영위하고 경쟁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정치적 민감도를 낮추고 에너지 안보와 에너지 전환이 순방향적인 정책적 연계를 이룰 때, 양 목표는 바람직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에너지 안보의 접근과 필요성을 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산업계의 노력 뿐만 아니라 학계, 정계, 언론, 그리고 국제적인 논의 동향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정보 분석과 논리 개발에 달려 있다. 석유 업계는 이러한 정책적 공공재를 보다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제 알아서 모든 것을 제공받는 시기는 지났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세계적으로 히트작이 된 <오징어 게임>에서는 친숙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이 등장한다. 술래가 무궁화꽃 구호를 외치는 동안 빨리 전진해야 하고, 뒤를 돌아볼 때 움직이게 되면 실격이다. 탄소 규제 하에서 석유산업의 전환은 공교롭게도 이 게임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새로운 규제 환경은 향후 주기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그 사이 몇 번의 출구는 열린다. 포스트-코로나 시기 동안 몇 번의 작은 호황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다만 너무 일찍 나가도 손해가 발생하고, 너무 늦게 나가도 위험하고, 균형을 잡지 못해 흔들려도 도태된다.
코로나 시기는 기존 경제 및 에너지와 관련된 패러다임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라이프 스타일이 변하고, 디지털화, 전기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수송 분야의 혁신과 더불어 에너지 산업 분야의 통합과 분화는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포스트-코로나 시기에 이 모든 것들은 기존의 자리로 그대로 돌아갈 것인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분명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2050년에 이르러도 석유산업은 여전히 중요한 경제의 축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든 산업 주체들이 그 몫을 향유한다는 보장은 없다. 노병은 죽지 않지만 좋았던 옛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 무한경쟁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덜 빛나는 자리에서 더 많은 규제에 대응하며 살아남아야 한다. 거대한 구조조정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고, 석유산업의 출구전략과 전환전략은 필수적이다. 여기서의 원칙은 하나다: “빠르고, 깨끗해야 살아남는다.” 상류 부문에서는 여전히 생산경쟁력을 지닌 자원의 보유가 관건이라면 하류 부문에서는 저탄소 역량 및 수소, 해상풍력, 이산화탄소 포집・활용・저장(CCUS)등 인근 영역에서의 기술력이 핵심이 된다. 여기에는 고부가가치 영역을 중심으로 한 석유 산업의 포트폴리오 조정, 국경간 탄소조정(CBAM)및 탄소세를 대비한 프로세스별 탄소감축, 생산관련 정보 및 국제 규제관련 동향에 대한 정보 분석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산업 간 인력전환 계획의 현실적 수립도 요구된다.
석유산업이 생존하고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의 확보 역시 중요하다. 과거와 같이 전통 에너지 부문에 인재들이 알아서 찾아오고 필요한 재원을 쉽게 공급받던 비즈니스 모델이 갑자기 변화하기 시작한 생경한 상황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탄소라는 새로운 변수가 주요한 상수가 되면서 대형 투자에 있어 위험도가 증가하고, 자금 조달과 투자도 훨씬 까다로워지고 있다. 석유산업은 새로 들어온 직원에게, 새로 연구를 시작하는 대학생에게, 그리고 자식과 후배들에게 이 분야가 왜 이번 세대에도 여전히 유용한가를 설득시켜 내야 한다. 그 답은 산업 현장에 있는 구성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탄소중립|에너지안보|CCUS|탄소국경세|CBAM|석유산업